다이다이 서점에서

🔖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의 수만큼 이야기가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직접 이야기를 듣는 일은 드물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알고 싶으니까 읽는다. 입장이 다르면 풍경도 변하기 때문에 모든 입장에서 보고 싶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권력자의 눈과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의 눈은 서로 다른 것을 본다. 오오카 쇼헤이의 「들불(소화, 1998)」을 읽어보면,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해온 사람이 인육을 먹기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전쟁터가 어떻게 사람을 이상한 상황으로 몰아넣는지를 뇌리에 새길 수 있다.

🔖 린코 짱이 서점의 서가를 보고 “여전히 약자의 책만 가득하네. 그런 면에서 전혀 흔들림이 없네”라고 중얼거린 적이 있다. 나는, 그런가 하며 서가를 바라보고, 의식한 적은 없지만 확실히 약자들뿐이네, 하고 수긍했었다. 미나마타병 환자에 한센병 요양소 입소자, 전쟁의 무수한 피해자, 이런저런 이유로 차별당하는 사람들, 의지할 데 없는 사람……. 마음이 가는 책을 고른 것이다. 귀를 기울이고 싶은 것은 가냘픈 목소리로, 그 목소리는 사람을 억누르려고 하는 큰 목소리보다도 힘차고 매력적이다.

그런데 린코 짱은 훗날 첫 번째 책의 추천사에서 “약자의 이야기가 쓰여 있다는 의미뿐 아니라 약해진 사람들을 위한 책이 놓여 있다는 의미도 있었다”고 했다. 서가를 보고 있을 때나 린코 짱의 사진을 보고 있을 때, 때때로 그 말들을 떠올리며, 지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을 수 있을지 생각한다.

🔖 이시무레 씨는 어린 시절 마을의 노파에게 이런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음, 이 아이는..... 혼이 나가 있네. 다카자레키의 버릇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어.”

구마모토 사투리로 서성거리며 떠도는 것을 ‘사레쿠’라고 한다. 이시무레 씨는 자신의 고향에서는 영혼이 놀러나가 마냥 돌아오지 않는 자를 ‘다카자레키의 버릇이 들었다’라든가 ‘도오자레키가 들러붙었다’고 말한다고 썼다.

나도, 어린 시절부터 책만 읽고 있으니까, 다카자레키의 버릇이 붙었다. 어디에도 가지 않고 책에서 들리는 소리에 의지해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이시무레 씨처럼 종횡무진은 아니지만, 비틀비틀 떠돌았다.

이시무레 씨의 책을 읽음으로써, 그 영혼과 함께한다. 아득하게 먼 저쪽에 계실 때는 멀리서 보는 것밖에 안 되지만, 적어도 같은 곳을 바라보려고 귀를 기울이고 응시한다. 평소에는 멀리 있는, 바다의 목소리, 산의 목소리. 그리고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게 된 산의, 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새끼 여우가 된 이시무레 씨를 만날 수 는 없을까 두리번거린다.